|
|
| 1번째 줄: |
1번째 줄: |
| '''노르말리자초네'''(<small>이탈리아어:</small> Normalizzazione)는 1935년 11월 16일부터 1936년 8월 1일까지 [[이탈리아 왕국]]에서 진행된 전쟁 수행·군수 조정 절차 개편이다. | | == 개요 == |
| | | '''노르말리자초네'''(<small>이탈리아어:</small> Normalizzazione) |
| 이 사건은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중 드러난 군수 차질과 검은셔츠 민병대 지휘권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1935년 11월 북부전선 지휘권을 넘겨받은 뒤 로마에 보급{{D}}지휘권 보고를 올렸고, [[페데리코 바이스트로키]]와 [[우고 카발레로]]는 육군성 회의에서 이를 제국 전쟁 수행에 있어서 중대한 문제로 다뤘다.
| |
| | |
| 1936년 7월 17일 밤 ''''파시즘 대평의회''''는 '''「제국 전쟁 수행 정상화와 군수조정에 관한 대평의회 결의」'''를 가결했다. 결의는 ''''코만도 수프레모''''의 해외작전 사전검토권, 검은셔츠 민병대 해외파견 부대의 전구별 작전지휘 통합, 전시생산조정위원회 설치, 리비아{{D}}도데카네스{{D}}동아프리카의 항만{{D}}정비{{D}}통신{{D}}연료시설 우선사업 지정을 포함했다. 1936년 8월 1일 ''''왕령 제1324호''''가 공포되면서 결의는 시행 절차로 넘어갔다.
| |
|
| |
|
| == 배경 == | | == 배경 == |
|
| |
|
| 1935년 10월 3일 [[이탈리아 제국|이탈리아 왕국]]은 에리트레아와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방면에서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북부 전선은 [[에밀리오 데 보노]]가 지휘했고, 남부 전선은 [[로돌포 그라치아니]]가 맡았다. 마사와 항만에는 홍해를 통해 병력, 차량, 포탄, 연료, 식량, 동물수송 장비가 들어왔고, 에리트레아 고원으로 향하는 도로와 야전 창고는 북부전선의 진격 속도를 제한했다.
| | 1936년 5월 5일 [[이탈리아 왕립군]] 총참모장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가 이끄는 동아프리카 부대가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하며 ''''제2차 이탈로-에티오피아 전쟁''''은 종결되었으나 침공 개시부터 누적되어온 보급과 인프라 부담을 견지한 바돌리오는 5월 8일 '''아디스아바바 입성 이후 군사 정리에 관한 비밀 각서'''(<small>이탈리아어:</small> Promemoria riservato sulla sistemazione militare successiva all’ingresso in Addis Abeba)를 로마로 송신해 문제를 알리고자 했다. |
| | |
| 1935년 11월 첫째 주 마사와 항만 야적장에는 군수품 약 4,200톤, 차량 부품 상자 1,100개, 야포탄·박격포탄 혼재 화물 약 38만 발분, 연료 드럼 약 2만 7천 개가 분류 지연 상태에 놓였다. 11월 7일 에리트레아 원정군 제2군단 보급참모는 75mm 산포탄을 요청했지만, 마사와 제3부두에서 전방으로 보낸 화물 일부는 기관총 탄약과 야전병원 장비로 확인되었다. 육군성 병참국의 카를로 프레티 대령은 11월 12일 ''''「마사와 항만 하역 및 전방 배분 실태 보고」''''를 작성해 페데리코 바이스트로키와 코만도 수프레모 참모국에 올렸다.
| |
| | |
| 11월 16일 [[베니토 무솔리니]]는 데 보노를 경질하고 [[피에트로 바돌리오|바돌리오]]를 에티오피아 북부전선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바돌리오는 아스마라 북부전선 사령부에서 기존 전선별 지휘 관행, 검은셔츠{{D}}정규군 간 화물 배분, 마사와-아스마라 도로 수송력, 현장 지휘관의 작전일정 보고를 점검했다. 11월 18일 02시 40분, 아스마라 사령부 전신실은 로마 육군성으로 ''''「아스마라 전문 제27호 — 북부전선 지휘권 및 수송 상태」''''를 송신했다.
| |
| | |
| 전문이 로마에 도착한 날, ''''국제연맹''''의 대이탈리아 제재도 시행되었다. 제재는 석유 전면 금수를 포함하지 않았지만, 육군성 병참국과 해군 수송국은 수입{{D}}금융{{D}}장기 군수 발주의 차질을 우려했다.
| |
| | |
| == 군부 내부 문제 제기 ==
| |
| | |
| 1935년 12월 3일 10시, 바이스트로키는 로마 육군성 청사 2층 참모회의실에 우고 카발레로, 마리오 로아타, 육군성 병참국 장교, 해군 수송국 연락장교, 공군성 작전연락관을 호출했다. 회의는 13시 20분까지 열렸다. 참석자들은 마사와 하역량과 전방 수송량 불일치, 검은셔츠 부대의 독자 화물 요청, 항공정찰 자료 전달 지연, 소형 차량 부품과 타이어{{D}}공기필터 부족, 야전병원 장비와 포병 탄약의 적재 우선순위 충돌을 다뤘다.
| |
| | |
| 회의 뒤 바이스트로키는 바돌리오에게 추가 현장 보고를 요청했다. 12월 6일 작성된 ''''S.M.E./R-144/35'''' 문건에는 정치동원 조직과 정규군 지휘계통의 구분, 항만-창고-수송대-전방집적소의 단일 번호체계, 전시생산 우선순위 사전검토권이 들어갔다. 이 문건의 표제와 본문에서 ''''Normalizzazione''''라는 표현이 처음 붙었다.
| |
| | |
| 1936년 5월 5일 [[이탈리아 왕립군|이탈리아군]]이 아디스아바바에 들어갔다. 5월 9일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제국]] 성립을 선포했다. [[국가 파시스트당]] 서기 [[아킬레 스타라체]]는 5월 18일 ''''팔라초 리토리오 회의''''에서 검은셔츠 부대의 아프리카 전공을 대규모 선전 행사로 확대하라고 지시했으나 육군성은 5월 21일 현지 검은셔츠 부대의 무기{{D}}장비 반납과 정규군 지휘체계 편입 절차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유로 일정 축소를 요청했다. | |
| | |
| 스타라체는 육군성의 요청에 항의했고, 바돌리오는 5월 24일 무솔리니에게 직접 보고하며 행사는 개선식보다 취지를 제국 선포 기념행사에 맞춰 다시 편성되었다.
| |
| | |
| == 바돌리오의 로마 귀환 ==
| |
| | |
| [[피에트로 바돌리오|바돌리오]]는 1936년 5월 11일부터 14일까지 아디스아바바, 마사와, 치암피노 비행장을 거쳐 로마로 돌아왔다. 5월 14일 오후 그는 베네치아 궁전에서 [[베니토 무솔리니|무솔리니]]를 독대했다. 바돌리오는 전승 행사를 수용한다는 뜻을 먼저 밝힌 뒤, 원정군 보고서가 대평의회에 올라가기 전에 전쟁 지속능력 점검 문건을 무솔리니가 직접 확인해야 한다고 전했다. | |
| | |
| 무솔리니는 문건 표지를 넘기며 '''“제국이 선포된 지 닷새다. 그런데 장군들은 벌써 창고 열쇠를 세고 있군.”'''이라고 말했다. 이에 바돌리오는 전쟁 지속능력에 대한 분석표를 꺼냈다. 그 표에는 항만별 하역 능력, 리비아 연료 저장량, 동아프리카 수송손실률, 검은셔츠 부대 지휘권의 실패 사례가 붙어 있었다.
| |
| | |
| '''“두체, 제국은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제가 들고 온 것은 저희가 지키려는 이 제국이 다음 겨울에도 움직일 수 있는지에 관한 표입니다.”'''
| |
| | |
| 무솔리니는 문건을 비서실에 보관하게 했다. 같은 날 저녁 카발레로는 육군성으로 돌아가 바돌리오가 제출한 표를 군부 공동각서의 부록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 |
| | |
| 5월 28일 18시, 바돌리오는 팔라초 카포디페로의 총참모부 비공식 회의실에서 바이스트로키, 카발레로, [[이탈로 발보]], 해군 대표 도메니코 카바냐리 측 연락장교, 공군성 참모대표를 만났다. 발보는 보급선 유지를 위한 예산을 요구했고, 해군 연락장교는 동아프리카와 리비아 수송선단을 동시에 유지하려면 항만 배분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육군 측은 검은셔츠 부대의 독립 작전명령을 제한하는 조항을 넣자고 했다. 공군 대표는 항공정찰과 폭격 우선순위의 독자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
| | |
| 바돌리오는 회의 말미에 표현을 고쳤다. 초안의 '''“군부의 권리”'''라는 문구는 빠졌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기술적 수요”'''가 들어갔다. 5월 29일 총참모부는 비공식적으로 '''「전쟁 수행 정상화에 관한 군부 공동각서」'''를 작성했다. 초안 머리는 두체의 최종 결심권을 전제로 삼았고, 본문은 그 결심이 물자{{D}}시간{{D}}병력의 실제표와 맞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이어졌다.
| |
| | |
| == 베네치아 궁전 접견 ==
| |
| | |
| 1936년 6월 3일 16시 30분, [[피에트로 바돌리오|바돌리오]]와 바이스트로키는 베네치아 궁전 두체 집무실에서 무솔리니에게 '''「전쟁{{D}}군수 및 해외작전 사전조정에 관한 각서」'''를 제출했다. 각서는 47쪽이었고, 부록은 6종이었다.
| |
| | |
| 각서는 코만도 수프레모가 해외작전 계획의 실행 가능성 확인서를 작성하고, 해외작전에 투입된 검은셔츠 부대가 정규군 사령부의 작전지휘를 따르며, 파시스트당의 대중동원 계획이 군수동원과 사전 조정되도록 했다. 군수기업 발주는 6개월 단위에서 18개월 단위로 바꾸고, 리비아{{D}}도데카네스{{D}}동아프리카의 항만{{D}}정비{{D}}통신 사업은 국방우선사업으로 지정하도록 했다.
| |
| | |
| 마지막 쪽에는 '''“코만도 수프레모는 현행 절차가 유지될 경우 다음 해외작전의 지속기간과 손실률에 대한 보증을 설 수 없다.”'''는 문장이 들어갔다. 바이스트로키는 접견 전 이 문장을 완화하자고 했지만, 바돌리오는 문구를 남겼다. 무솔리니는 그 문장을 다시 읽고 바돌리오를 보았다.
| |
| | |
| '''“원수는 내게 허락을 구하러 온 것인가, 아니면 날짜를 고치러 온 것인가.”'''
| |
| | |
| 바돌리오는 각서의 부록을 펼쳤다. 그는 '''“두체께서 전쟁의 시간을 정하시면, 군은 그 시간에 맞춰 움직입니다. 다만 시간이 물자보다 빨리 달리면, 군은 그 간격을 병사로 메울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무솔리니는 각서를 회수하지 않았다. 비서실은 그날 저녁 스타라체에게 별도 접견 대기 지시를 보냈다.
| |
| | |
| 스타라체는 6월 7일 '''「당 동원권과 민병대 성격에 관한 서기국 의견」'''을 무솔리니 비서실에 제출했다. 문건은 검은셔츠 민병대의 독립적 정치{{D}}군사 상징성, 지방 파시스트 조직의 전시 동원권, 군수동원과 대중운동의 결합을 요구했다. 6월 8일 팔라초 리토리오 서기국 회의에서 그는 '''“민병대를 행군표에만 묶어두면, 혁명의 행진은 누가 지휘하는가.”'''라고 말했다.
| |
| | |
| 무솔리니는 6월 11일 바돌리오와 스타라체를 따로 불렀다. 바돌리오는 검은셔츠 민병대의 국내 동원{{D}}의례{{D}}청년훈련 기능을 월권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대신 해외작전과 군수 수송에서는 정규군 지휘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 |
| | |
| == 수정안과 상정 결정 ==
| |
| | |
| 6월 15일부터 22일까지 무솔리니 비서실, 코만도 수프레모 조정반, 팔라초 리토리오 서기국은 제출용 문구를 다시 맞췄다. 바돌리오는 “민병대의 해외작전 독립권 폐지”를 “해외작전 투입 민병대의 전구별 작전지휘 통합”으로 고쳤다. “당 동원계획의 군부 승인”은 “당 동원계획과 군수수송표의 사전 합치 확인”으로 바뀌었다. “군수산업의 군부 우선통제”는 “군수 발주와 원자재 배분에 대한 군부 대표의 사전검토 참여”로 들어갔다.
| |
| | |
| 6월 22일 「정상화 안건 대평의회 제출용 수정본」이 완성되었다. 부속문서에는 스타라체 수정의견 9개 조항, 바돌리오 보충설명서 14쪽, 카발레로의 군수표 부록이 붙었다. 스타라체는 검은셔츠 민병대의 명칭, 부대기, 제복 표식, 정치연락관을 유지하는 조항을 확인했다. 바돌리오는 작전명령권과 보급요청 절차를 전구 지휘관 아래로 넣는 조항을 남겼다.
| |
| | |
| 6월 24일 21시 15분, 무솔리니는 베네치아 궁전 두체 집무실에 바돌리오, 스타라체, [[갈레아초 치아노]], [[주세페 보타이]]를 불렀다. 치아노는 국제연맹 제재 이후 수입·금융 경로가 군수 일정에 영향을 준다고 보고했고, 보타이는 조합성의 산업조정 절차를 군수 발주표와 연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무솔리니는 대평의회 상정을 지시했다.
| |
| | |
| “대평의회에서 결정한다. 군은 표를 가져오고, 당은 군중을 가져온다. 국가는 둘 다 필요로 한다.”
| |
| | |
| == 파시스트 대평의회 ==
| |
| | |
| 1936년 7월 1일부터 베네치아 궁전, 팔라초 리토리오, 외무성, 코만도 수프레모에서는 대평의회 상정 전 접촉이 이어졌다. 스타라체는 검은셔츠 민병대의 명예와 당 조직의 동원권을 요구했다. 보타이는 조합국가의 산업조정 절차를 안건 안에 넣으려 했다. 치아노는 제재와 외교 비용을 고려한 군수 우선순위표를 지지했다. 발보는 리비아 도로·항만·항공망 예산을 요구했다. 데 보노는 자신의 1935년 교체가 논의의 출발점으로 다뤄지는 상황에서 공개 발언을 줄였다.
| |
| | |
| 스타라체는 7월 6일 검은셔츠 해외작전 부대에 독자 정치장교를 둘 것을 요구했다. 바돌리오는 전구 지휘관 아래의 연락장교는 허용했지만, 별도 명령권을 가진 정치장교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7월 10일 무솔리니 비서실 조정안에는 “민병대 정치연락관”이라는 명칭이 들어갔다. 작전명령권은 전구 지휘관이 갖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 |
| | |
| 7월 17일 20시 30분, 베네치아 궁전의 파시스트 대평의회 회의실에서 「제국 전쟁 수행 정상화와 군수조정에 관한 대평의회 결의」가 상정되었다. 의장은 무솔리니가 맡았다. 바돌리오, 스타라체, 치아노, 보타이, 디노 그란디, 발보, 데 보노, 체사레 마리아 데 베키, 바이스트로키, 카발레로가 회의에 참석했다.
| |
| | |
| 바돌리오는 안건 설명에서 각서의 수정 과정을 먼저 보고했다. 그는 검은셔츠 민병대의 국내 동원과 의례 기능을 결의 전문에 남겼고, 해외작전 부대의 보급요청과 작전명령은 전구 지휘관에게 모이도록 했다. 이어 그는 “두체의 명령은 이탈리아군의 출발점입니다. 제가 요구하는 것은 그 명령이 전선 끝까지 도착하는 길입니다.”라고 말했다.
| |
| | |
| 스타라체는 당 조직의 전시 역할을 다시 물었다. 그는 “당은 전쟁을 위해 사람을 만들었다. 군은 그 사람을 숫자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보타이는 군수 발주 18개월 계획제가 조합성의 산업조정 절차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발보는 리비아 항만과 항공망 사업을 제국 방어 우선사업 목록에 넣는 조건을 확인했다.
| |
| | |
| 7월 18일 01시경, 무솔리니는 표결 전 정리 발언을 했다.
| |
| | |
| “당은 국민을 일으킨다. 군은 전선을 유지한다. 제국은 그 둘의 불일치를 견디지 않는다.”
| |
| | |
| 표결은 01시 40분에 끝났다. 찬성 22, 조건부 찬성 5, 반대 3, 기권 2였다. 결의는 코만도 수프레모의 해외작전 사전검토권, 전시생산조정위원회 설치, 검은셔츠 민병대 해외파견 부대의 전구별 작전지휘 통합, 파시스트당의 국내 동원·선전·청년훈련·후방 사기 유지 업무, 리비아·도데카네스·동아프리카의 항만·정비·통신·연료시설 우선사업 지정, 바돌리오의 전쟁·군수 조정회의 주재를 포함했다. 결의 전문에는 무솔리니의 최종전쟁지도권과 대평의회의 정치 승인 절차가 함께 들어갔다.
| |
| | |
| 회의가 끝난 뒤, 01시 50분경 스타라체는 회의실 밖 복도에서 바돌리오에게 “당이 후방으로 밀려난 것은 아니오.”라고 말했다. 바돌리오는 “후방이 무너지면 전선도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 |
| | |
| == 시행령과 제도화 ==
| |
| | |
| 1936년 8월 1일, 왕궁과 베네치아 궁전은 「왕령 제1324호 — 제국 방위 및 전쟁 수행 정상화 조치」를 공포했다. 서명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무솔리니였다. 육군성, 해군성, 공군성, 식민지성, 조합성이 공동서명 부서로 붙었다.
| |
| | |
| 왕령 제1조는 코만도 수프레모의 해외작전 사전검토권을 규정했다. 제2조는 전시생산조정위원회를 설치했고, 제3조는 군수 발주 18개월 계획제를 도입했다. 제4조는 검은셔츠 해외파견 부대의 전구별 작전지휘 통합을 명시했다. 제5조는 리비아·도데카네스·동아프리카의 항만·정비·통신·연료시설을 제국 방어 우선사업으로 지정했다. 제6조는 파시스트당의 후방 동원·선전·청년훈련 권한을 확인했다. 제7조는 무솔리니의 최종전쟁지도권과 대평의회 정치승인 절차를 넣었고, 제8조는 바돌리오를 전쟁·군수 조정회의 상임의장으로 지정했다.
| |
| | |
| 8월 20일 조합성 청사 3층 산업조정실에서 전시생산조정위원회 첫 회의가 열렸다. 바돌리오, 보타이, IRI 대표 알베르토 베네두체 측 실무자, 피아트, 안살도, 브레다, 피렐리, 오토 멜라라, 아지프 연락관이 참석했다. 회의는 차량·타이어·연료·무전기·야포 부품 표준화와 리비아·동아프리카 기반시설 우선순위를 의제로 삼았다.
| |
| | |
| 피아트는 9월 3일 사막용 표준 3톤 트럭 단일계약을 요구했다. 육군 정비국은 차량 종류 축소에 동의했지만, 해군 수송국은 항만 크레인과 선박 적재 규격 때문에 3톤급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고했다. 10월 12일 제4차 회의에서 1.5톤, 3톤, 5톤급 세 종류가 표준군으로 지정되었다. 피아트는 3톤급 주계약을 확보했고, OM과 란치아는 보조계약 일부를 배정받았다.
| |
| | |
| 검은셔츠 민병대 문제도 시행령 이후 다시 다뤄졌다. MVSN 지휘부는 1936년 9월 리비아에 “검은셔츠 특수공세단”을 별도 편성하려 했다. 코만도 수프레모는 9월 28일 편성안을 보류시켰고, 10월 16일 “사막정찰대대”라는 이름으로 정규군 휘하에 편입하는 절충안을 승인했다. 스타라체는 명칭, 제복 표식, 부대기, 정치연락관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 |
| | |
| 10월 4일 육군성 비공개 면담에서는 그라치아니의 배치가 다뤄졌다. 그라치아니는 리비아 주공 지휘선에서 빠지고, 동아프리카 치안·레반트 방면 연구·식민지 보안 업무로 옮겨졌다. 그는 “리비아는 종이 위의 창고가 아니라 전선이다.”라고 반발했다. 바돌리오는 같은 자리에서 “전선이기에 창고부터 세어야 한다.”고 답했다.
| |
|
| |
|
| 1937년 6월까지 트리폴리·벵가지·토브룩 항만 하역표가 다시 작성되었고, 토브룩과 벵가지에는 차량부품 창고가 설치되었다. 트리폴리-시르테 보급로에는 정비소 6곳이 배치되었고, 벵가지-데르나-토브룩 축에는 무전중계소 11곳이 세워졌다. 토브룩의 연료 저장능력은 1936년 9월 대비 1937년 말 1.8배 확대되는 계획표에 들어갔다.
| | 5월 12일 전쟁성 국무차관 [[페데리코 바이스트로키]]는 5월 9일 바돌리오의 보고가 [[베니토 무솔리니|무솔리니]]로부터 묵살 당하자, 전쟁성을 통해 동아프리카의 주둔 소요가 본토 육군 재편을 방해하고 [[대게르만국|독일]]의 급진적인 대외 정책이 오스트리아와 브레너 고개 방면을 위협할 시에 대응력이 저하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무솔리니는 바이스트로키의 경고를 공식적으로 반박하지 않았지만, 더 많은 근거를 가져오라며 전쟁성 내부의 검토 사안으로 보류했다. |